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771

죽은 종의 이름으로 열 해를 산 사내, 그 종의 어미가 찾아왔습니다 "복동아."활방 문 앞에서 늙은 여인이 사내를 불렀습니다. 사내가 돌아보았고, 여인은 그 얼굴을 보더니 그 자리에 굳어 버렸지요.여인의 아들 복동이는 열 해 전에 죽었습니다. 제 손으로 옷가지를 태웠으니 모를 리가 없었지요.그런데 그 이름으로 대답한 사내가 눈앞에 서 있었습니다.그 이름 두 자가 어디서 왔는지는, 열 해 전 충주 고을에서 시작됩니다.그 고을 군기를 맡아보던 남정현이라는 무반이 있었습니다. 관에 들어오는 활을 하나하나 살펴 받는 것이 그 사람 일이었지요.하루는 열여섯 난 아들에게 활 한 장을 보이며 겉껍질을 살짝 떴습니다. 그 아래에 가느다란 줄이 셋 있었지요."내가 보았다는 표다. 겉에 새기면 겉만 흉내 내면 그만이다. 껍질 밑에 새겨야 흉내를 못 낸다.""그리고 가운데 것을 길게 새긴다.. 2026. 8. 30.
제 잘못을 대신 뒤집어써 준 늙은 장인이 곤장을 맞고 사라지자, 젊은 벼슬아치가 한 일 가마 하나가 마당에 놓여 있었습니다.임금께서 타실 것이었지요. 옻칠이 곱게 올랐고 금박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마의 뒤쪽 축이 부러져 있었지요.부러진 자리가 하얬습니다. 나무가 오래 말라 죽은 자리는 누렇게 삭는데, 그 자리는 갓 부러진 것처럼 희었습니다.그 축을 깎으라 이른 사람은 송경석이라는 젊은 관원이었습니다.나이는 스물여섯이었고, 그 전해 가을에 문과에 급제했지요. 어릴 적부터 글만 읽어 낫이나 대패는커녕 삽자루도 쥐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공조에 배치되어, 임금께서 타실 가마를 맡게 되었지요.공방 안쪽 구석에는 예순이 넘은 노인이 하나 앉아 있었습니다. 관노로 나서 벼슬에 오른 사람이었지요."이 나무는 얼마나 말립니까.""세 해요. 급히 마르면 겉만 마르고.. 2026. 8. 30.
곡식 서른 섬 도둑으로 아비가 끌려가자, 종의 딸이 고을 좌수를 마당으로 불러냈습니다 고을 한복판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쓰는 곳간이 하나 있었습니다.그 곳간을 지키는 사람은 무돌이라 했습니다. 쉰여덟이었고, 좌수 댁에 딸린 종이었지요. 글도 셈도 몰랐으나 곡식이 몇 섬 드나들었는지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아세요?""발로 안다. 삼십 년을 밟으면 안다."무돌에게는 열아홉 난 딸 새복이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곳간 둘레를 돌게 시켰지요."곡식을 훔치는 놈이 대문으로 들어오겠느냐. 앞은 누구나 본다. 그러니 도둑은 뒤로 온다."그해는 걷이가 넉넉해 곳간이 그득 찼습니다. 서른 섬이었지요.곡식을 들이던 날, 한좌수가 곳간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대문으로 나가지 않고 곳간을 한 바퀴 돌아 뒤꼍으로 갔지요. 담 밑에 서서 한참을 보다가, 발끝으로 땅을 두어 번 눌러 보았습니다."나.. 2026. 8. 30.
저를 팔아넘겼다 믿고 스무 해를 원망한 사내, 포구에는 잠녀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그해 여름, 섬에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밭이 갈라졌고 바람이 사나워 배도 못 나갔습니다. 잠녀들도 물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지요.바닷가 마을에 오누이가 살았습니다. 누이는 보름이라 했고 그해 열여덟이었습니다. 동생은 칠복이라 했고 열둘이었지요.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떴고, 아버지가 탄 배는 그해 봄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보름은 열셋부터 물에 들어갔습니다. 칠복은 바위에 앉아 누이를 기다렸지요. 태왁이 물 위에 떠 있다가 그 곁으로 누이 머리가 쏙 올라오면, 그제야 저도 모르게 숨을 뱉었습니다. 누이가 물속에 있는 동안은 저도 숨을 참고 있었던 것입니다.가을이 되어도 비는 오지 않았고, 사람들이 하나둘 뭍으로 나갔습니다. 뱃삯은 어른 하나에 스무 냥, 아이는 그 반이라 했지요.그날 밤 보름은 잠을 자.. 2026. 8. 30.
떠돌이 환쟁이의 그림을 제 솜씨라 속이고 감사 앞에 나선 고을 참봉 고을에 그림 잘 그리는 어른이 하나 났다는 말이 돌았습니다.박참봉이라는 사람이었지요. 사람들이 그 집 사랑방에 걸린 그림을 보고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붓끝이 어찌나 야무진지 그림 속 사람의 눈동자가 보는 이를 따라 도는 것 같았으니까요.그런데 그 무렵 장터 한구석에서는, 떠돌이 환쟁이 하나가 국밥값을 못 내고 앉아 있었습니다.계춘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등에 진 것이라고는 봇짐 하나와 붓통이 전부였지요. 그 붓통은 도화서에서 붓을 잡던 아버지가 남긴 것이었습니다.계춘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그렸습니다. 먼저 묻고, 오래 듣고, 그러고 나서 붓을 들었지요. 웃으실 때 어느 쪽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는지, 화가 나면 어디를 만졌는지를 물었습니다."눈코입은 누구나 그립니다. 그런데 그것만 그려 놓으.. 2026. 8. 30.
그 집에서는 밤마다 다듬이 소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마을에서는 아무도 들은 적이 없다 하였지요 빈집이었습니다.싸리문은 반쯤 내려앉았고 마당에는 마른 풀이 사람 무릎까지 자라 있었지요. 그런데 그 마당 한복판에 다듬잇돌 하나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풀이 그 돌만 비껴 자란 것처럼 둘레가 훤했습니다.그 집에 든 이는 서윤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태 전까지 이웃 고을 관가에서 문서를 다루던 아전이었지요. 창고의 곡식이 축났고, 장부를 맡았던 사람이 책임을 졌습니다."제가 적은 것과 창고에 있는 것이 다릅니다."그 말을 여러 번 했으나 아무도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서윤보는 말수가 줄었지요.값이 그리 싼 까닭을 물으니, 집을 놓아 준 사내는 오래 비어 있어 그렇다고만 했습니다.그 까닭을 알게 된 것은 그날 밤이었습니다.또드락, 또드락.느리고 고른 소리였습니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달이 밝아.. 2026. 8. 23.
주막을 빼앗으려 외상값을 거꾸로 뒤집은 객주, 그 집 아궁이 뒤에는 짚 다발이 걸려 있었습니다 옛날 옛적, 경상도 어느 고을 어귀에 지붕이 나직한 주막 한 채가 있었습니다.주막을 꾸리는 이는 순덕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지아비를 잃고, 눈 어두운 시어머니 곰례와 둘이서 그 집을 지켰지요.순덕에게는 큰 근심이 하나 있었습니다. 글을 몰랐던 것입니다. 외상은 자꾸 생기는데 적어 둘 수가 없었지요.어느 날 부엌 뒤에 쪼그려 앉은 며느리 곁에, 시어머니가 짚 한 줌을 들고 와 앉았습니다."글을 모르면 손으로 적으면 되느니라."같은 짚으로 새끼 두 오리를 꼬아, 두 줄 같은 자리에 매듭을 하나씩 앉혔습니다. 하나는 주모가 갖고 하나는 술 마신 사람이 갖는 것이었지요."갚으면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함께 푼다. 매듭은 두 손이 지어야 풀리느니라."그 뒤로 주막의 셈은 짚으로 갔습니다. 아궁이 뒤 시렁에 짚 다발.. 2026. 8. 23.
어미 장례비로 맡긴 은가락지, 세 해 만에 찾으러 가자 무게가 달랐습니다 옛날 옛적, 강원도 원주 장터에 은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은을 녹여 비녀며 가락지를 짓기도 하고, 급한 사람이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려 가기도 하는 집이었지요.장터에서 남쪽으로 십 리쯤 가면 청산댁이라는 여인이 딸 하나를 데리고 살았습니다.이 여인에게는 이상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왼손 넷째 손가락의 은가락지를 한 번도 빼지 않는 것이었지요. 밭을 매면서도 끼고 있었고, 빨래를 하면서도 그대로였습니다."어머니, 그건 왜 안 빼세요.""안 빠진다."그리 말하고 웃었지요.청산댁이 자리에 누운 것은 그해 가을이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밤, 어미가 딸을 불러 왼손을 들어 보였습니다."이것만은 네 것이다. 굶어도 팔지 마라. 이것에는 네가 있다."곱단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어미는 그 밤을 넘기지 못했습.. 2026. 8. 23.
"사흘만 제 남편이 되어 주세요" — 청상과부가 지나던 선비에게 건넨 뜻밖의 부탁 옛날 옛적, 경상도 안동 고을에 이씨 문중이 있었습니다. 솟을대문이 높고, 고을 원님도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렸다지요.그 문중에 정월이라는 새댁이 있었습니다. 혼례를 올린 지 반년 만에 남편을 잃은, 스물한 살 청상과부였습니다.남편은 숨을 거두기 전날 밤, 정월의 손을 잡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내가 가거든…… 이 집을 나가시오."그때 정월은 그 말뜻을 알지 못했습니다.사십구재가 끝나고 열흘쯤 지난 날, 문중 어른들이 종가 사랑채에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문장 어른이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지요."자네들, 잘 생각해 보게. 며느리 하나의 목숨인가, 삼백 년 이어 온 문중인가."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침묵이 곧 답이었지요.그날부터 정월에게 사흘이 주어졌습니다. 밥상만 문 앞에 놓였다가.. 2026. 8. 22.
"삼 년만 기다려 다오" — 과거 보러 떠난 선비를 기다린 기생, 그 십 년의 끝에는 "관기가 사또의 명을 거역하다니! 당장 옥에 가두고 곤장을 쳐라!"평안도 성천 고을 관아 마당에, 한 여인이 끌려 나와 있었습니다. 사또의 수청을 들라는 명을 거역한 죄였지요.이 여인이 지키려 한 것은, 다섯 해 전 강가에서 한 사내와 나눈 약속 하나뿐이었습니다.그 사내는 한양에서 내려온 가난한 선비였습니다. 강선루가 좋다는 말을 듣고 왔으면서도, 정작 누각에는 오르지 않겠다던 사람이었지요."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강이 작아 보이거든. 나는 강을 작게 보고 싶지 않소."떠나던 날, 선비는 강둑에 어린 버드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삼 년만 주시오. 그 안에 급제해서 돌아오리다. 내가 돌아왔을 때 이 나무가 낭자보다 크거든, 내가 늦은 줄 알겠소."채련은 제 옷고름을 한 자락 찢어 그 가지에 매듭을 지어 .. 2026. 8.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