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781 형의 논에 밤마다 볏단이 늘기에 관아에 고했더니, 사흘째 밤 논둑에서 잡힌 사람이 충청도 어느 고을에 형제가 있었습니다.아비가 죽으면서 형 덕보에게 위쪽 닷 마지기를, 아우 칠성에게 아래쪽 석 마지기를 주었지요. 숫자만 보면 형이 더 받은 것이 분명했습니다."형이 더 받는 것은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듬해 여름 큰물이 나면서, 위쪽 논으로 올라가던 도랑이 산에서 흘러내린 돌에 묻혔습니다."내년에 하세."그 말이 나온 것이 십여 해 전입니다. 마을 논은 다 아래쪽에 있었고, 위쪽에 논을 가진 집은 덕보 하나였지요. 열 집이 아쉽지 않은 일을 한 집이 아쉬워한다고 해서 마을이 움직이지는 않습니다.덕보는 봄마다 혼자 산에 올라 돌을 파냈습니다. 사흘 파면 열 발쯤 나갔지요. 그런데 겨울이면 다시 무너졌습니다.그사이 아래쪽 석 마지기는 해마다 잘되었습니다."아우가 좋은 걸 가져갔구.. 2026. 9. 22. 유배객 집에 땔나무를 놓고 온 사람들이 하나씩 관아에 불려 갔습니다 윤경수는 새벽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서너 걸음이면 건너는 좁은 마당이라 쓸 것도 없었지요. 그래도 쓸었습니다.강원도 산골에 유배 온 지 삼 년째 되는 사내였습니다. 벼슬을 지낸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관아에서 정해 준 끝집에 머물며 마을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몸이었지요.처음에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그러다 아홉 살 계집아이 하나가 사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윤경수가 마른 흙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하나 그려 보였지요."이것이 사람이라는 글자다. 다리 둘이 걸어가는 모양이다."그 아이가 제 이름 석 자를 흙바닥에 적어 보인 날, 아비가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나갔습니다. 그날 저녁 무 두어 개가 사립 안에 놓였지요.산골의 겨울은 나무로 납니다. 그런데 죄인은 산.. 2026. 9. 22. 서른 해 동안 어미 무덤에 절을 한 사내, 마을은 그 무덤을 두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무돌은 새벽마다 흙을 밟았습니다.질흙을 펴 놓고 맨발로 밟아 나가는 것이지요. 손으로 주무르면 지나치는 돌도 발로 디디면 걸립니다. 돌 하나가 남아 있으면 그 항아리는 불 속에서 갈라지니까요.전라도 어느 고을, 산자락에 가마를 앉힌 옹기장이였습니다. 나이는 서른일곱이었지요.마을에서는 그를 효자라 불렀습니다.뒷산 중턱에 작은 봉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비석 대신 무릎께 오는 자연석 하나가 박혀 있었지요. 무돌은 초하루와 보름마다 그 무덤에 올랐습니다. 봄이면 첫 나물, 가을이면 첫 밤을 놓고 절을 두 번 했지요.말은 없었습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요.일곱 살 겨울에 어미가 병으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을 해 준 사람은 그를 데려다 키운 삼월이었지요. 무돌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그런.. 2026. 9. 22. 느티나무 그늘을 스무 냥에 판 부자, 그날 저녁 제 안방에 남이 누워 있었습니다 전라도 어느 고을 장터 어귀에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습니다. 어른 세 사람이 팔을 벌려야 밑동이 겨우 감기는 나무였지요. 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그 아래에서 여름을 났습니다.그런데 고을 제일가는 부자 한부자가 그 땅을 사들이더니, 담을 둘러 나무를 안쪽에 넣어 버렸습니다."저건 마을 나무 아니오.""문서에 마을 나무라고 적힌 데가 있소?"그 한마디에 아무도 대꾸를 못 했습니다. 적힌 데가 없었으니까요. 그 뒤로 정작 더운 한낮이면 그늘이 오그라들어 담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그해 유월, 연장통을 진 타관 사내 하나가 장터에 들어섰습니다. 석우라 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사흘 동안 그 나무 앞에 앉아 해가 질 때까지 가지만 올려다보았습니다."무얼 보는가.""그늘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고 있었습니다.".. 2026. 9. 21. 곤장 백 대를 대신 맞아 달라며 열 배 삯을 내민 부잣집 퍽, 퍽, 퍽.관아 마당에서 살점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형틀에 엎드린 사내는 억쇠라고 했지요. 서른넷, 어깨가 소처럼 두툼한 사람이었습니다.그런데 이 사내는 죄를 지어 그 자리에 엎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의 매를 대신 맞고 있었던 것입니다. 열 대에 한 냥이었지요.억쇠에게 그 요령을 가르친 이는 곽노인이라는 어른이었습니다."매는 살로 맞는 게 아니라 숨으로 맞는 것이니라."그 어른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었습니다. 일이 들어오면 꼭 죄목을 물었지요. 그리고 어떤 것은 맡지 않았습니다. 삯이 곱절이어도요."어른, 넉 냥입니다.""이놈아, 내 등은 하나뿐이다. 등이 하나뿐이니 아무 죄나 얹을 수는 없는 게야."억쇠는 그때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그 곽노인이 지난해 가을에 죽었습니다. 밤길에.. 2026. 9. 21. 첫날밤 신부가 신랑에게 먼저 절을 하라 하였습니다 고을 서쪽에 산이 하나 있었습니다.크지 않은 산이었지요. 명심네 것이었습니다. 벼슬을 하던 집안이 기울어 땅이 다 나가고도 그 산만은 지켰지요. 조상이 거기 묻혀 있었기 때문입니다.그 산 아래에 강씨네가 살았습니다. 고을에서 손꼽는 부자였지요.강진사의 아버지가 죽자 지관이 와서 이 산 저 산을 다니더니, 명심네 산 중턱을 가리켰다 합니다. 거기가 명당이라고요."그 산 중턱을 좀 쓰겠소.""팔 산이 아닙니다."세 번 청했고 세 번 다 거절당했습니다.그러다 어느 날 밤, 산에서 소리가 났습니다.명심의 아버지가 올라가 보니 사람 여럿이 관을 지고 오르고 있었지요. 횃불도 켜지 않고 어둠 속에서요."이 산은 내 산이오. 내려가시오!"그날 밤 그 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릅니다. 다만 이튿날 .. 2026. 9. 7. 시아버지 제삿날 며느리가 제사상을 뒤엎었습니다 그해 봄에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가을에 걷은 것이 예년의 서너 푼도 안 되었지요. 겨울이 오자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칡뿌리를 캐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습니다.그 마을에는 곽씨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문중이 크고 오래된 집안이었지요.그 문중에 정순이라는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나이는 스물넷이었고, 시집온 이듬해에 지아비를 잃었지요. 아이는 없었습니다.논은 장례를 치르는 데 나가고, 삼년상을 치르는 데 나가고, 문중에 낼 것을 내는 데 나갔습니다. 그렇게 하나도 안 남았지요.정순은 남의 집 일을 다녔습니다. 하루 품을 팔면 조 몇 되를 얻었고, 그것에 물을 잔뜩 부어 죽처럼 끓여 먹었습니다.옆집에는 일흔 난 목단이라는 노파가 살았습니다."할머니, 오늘 뭐 드셨어요.""물 마셨다."섣달이 되자 사람이 죽어 나.. 2026. 9. 6. "저를 잡아 가두시오" 어사라 속이던 사기꾼이 제 발로 수령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명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이는 서른다섯이었고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이 고을 저 고을을 떠돌았지요.두 해 전부터 그 짓을 시작했습니다.놋쇠 조각을 둥글게 갈아 한쪽에 말 비슷한 것을 새겼지요. 새기는 솜씨가 좋지 않아 말인지 개인지 알 수 없었으나, 말이라 하면 말로 보였습니다.고을에 들어가면 먼저 주막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관가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다물었지요. 그러면 며칠 안에 아전이 찾아왔습니다."혹시 나리께서."그러면 품에서 그것을 다 꺼내지 않고 한 귀퉁이만 보였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지요.명수에게는 스스로 세운 규칙이 셋 있었습니다.사흘 넘게 한 고을에 있지 않는다. 벼슬자리와 송사에는 손대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을 벌하지 않는다.셋째가 제일 중요했습니다. 어사 행세로 사람.. 2026. 9. 6. 혼례복을 입은 채 달아난 신부, 온 마을이 횃불을 들고 쫓아 나섰습니다 "이 댁에 시집오면 이태를 못 넘긴다 하더이다.""누가 그럽디까.""소인이 그럽니다."혼례를 하루 앞둔 밤이었습니다. 소를 먹이는 늙은이가 신부의 방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지요.배진사 댁은 고을에서 손꼽는 집이었습니다. 기와를 얹은 집이 세 채였고 논이 넓었지요. 그 집 아들 두식은 그해 스물이었는데, 벌써 세 번째 혼례였습니다.첫 며느리는 열여덟에 시집와 이태를 못 넘겼습니다. 둘째도 그러했지요. 둘 다 앓다가 죽었다 했습니다.다만 수군거리는 말은 있었습니다."그 댁 논이 또 늘었다더구먼."세 번째 신부는 이웃 고을 초씨 집 딸이었습니다. 이름은 초선이라 했고 열여덟이었지요. 혼수로 논 열 마지기가 딸려 왔습니다.가마에서 내려 마당을 보는데,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아무도 웃지 않았습니다.그날 밤, 문.. 2026. 9. 6. 눈 덮인 산으로 여섯 살 아이가 들어갔고, 그 산을 아는 사람은 미쳤다는 늙은이 하나뿐이었습니다 호랑이가 사는 산이라 하여 범산이라 불리는 산이 있었습니다.그 산 중턱에 늙은이 하나가 살았지요. 이름은 태보라 했고 나이는 예순아홉이었습니다. 그 집에 삼십 년을 살았는데, 마을 길에서 그 사람과 마주친 이가 몇 되지 않았습니다.말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물으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기만 했지요. 그러니 마을에서는 이렇게들 말했습니다."저 늙은이 성한 사람 아니야."아이들이 그 집 앞까지 올라가 돌을 던지고 도망쳐도 쫓아오지 않았습니다. 문을 열고 나와 한 번 보고는 도로 들어갔지요.그 마을에 봉구라는 사내가 살았습니다. 아들이 하나 있었고 여섯 살이었지요. 막둥이라 불렀습니다.막둥이는 산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노인들이 겁을 주려고 하는 범 이야기를 오히려 재미있어했지요."저는 안 물려요.""어째서.. 2026. 9. 6. 죽은 종의 이름으로 열 해를 산 사내, 그 종의 어미가 찾아왔습니다 "복동아."활방 문 앞에서 늙은 여인이 사내를 불렀습니다. 사내가 돌아보았고, 여인은 그 얼굴을 보더니 그 자리에 굳어 버렸지요.여인의 아들 복동이는 열 해 전에 죽었습니다. 제 손으로 옷가지를 태웠으니 모를 리가 없었지요.그런데 그 이름으로 대답한 사내가 눈앞에 서 있었습니다.그 이름 두 자가 어디서 왔는지는, 열 해 전 충주 고을에서 시작됩니다.그 고을 군기를 맡아보던 남정현이라는 무반이 있었습니다. 관에 들어오는 활을 하나하나 살펴 받는 것이 그 사람 일이었지요.하루는 열여섯 난 아들에게 활 한 장을 보이며 겉껍질을 살짝 떴습니다. 그 아래에 가느다란 줄이 셋 있었지요."내가 보았다는 표다. 겉에 새기면 겉만 흉내 내면 그만이다. 껍질 밑에 새겨야 흉내를 못 낸다.""그리고 가운데 것을 길게 새긴다.. 2026. 8. 30. 제 잘못을 대신 뒤집어써 준 늙은 장인이 곤장을 맞고 사라지자, 젊은 벼슬아치가 한 일 가마 하나가 마당에 놓여 있었습니다.임금께서 타실 것이었지요. 옻칠이 곱게 올랐고 금박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마의 뒤쪽 축이 부러져 있었지요.부러진 자리가 하얬습니다. 나무가 오래 말라 죽은 자리는 누렇게 삭는데, 그 자리는 갓 부러진 것처럼 희었습니다.그 축을 깎으라 이른 사람은 송경석이라는 젊은 관원이었습니다.나이는 스물여섯이었고, 그 전해 가을에 문과에 급제했지요. 어릴 적부터 글만 읽어 낫이나 대패는커녕 삽자루도 쥐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공조에 배치되어, 임금께서 타실 가마를 맡게 되었지요.공방 안쪽 구석에는 예순이 넘은 노인이 하나 앉아 있었습니다. 관노로 나서 벼슬에 오른 사람이었지요."이 나무는 얼마나 말립니까.""세 해요. 급히 마르면 겉만 마르고.. 2026. 8. 30. 곡식 서른 섬 도둑으로 아비가 끌려가자, 종의 딸이 고을 좌수를 마당으로 불러냈습니다 고을 한복판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쓰는 곳간이 하나 있었습니다.그 곳간을 지키는 사람은 무돌이라 했습니다. 쉰여덟이었고, 좌수 댁에 딸린 종이었지요. 글도 셈도 몰랐으나 곡식이 몇 섬 드나들었는지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아세요?""발로 안다. 삼십 년을 밟으면 안다."무돌에게는 열아홉 난 딸 새복이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곳간 둘레를 돌게 시켰지요."곡식을 훔치는 놈이 대문으로 들어오겠느냐. 앞은 누구나 본다. 그러니 도둑은 뒤로 온다."그해는 걷이가 넉넉해 곳간이 그득 찼습니다. 서른 섬이었지요.곡식을 들이던 날, 한좌수가 곳간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대문으로 나가지 않고 곳간을 한 바퀴 돌아 뒤꼍으로 갔지요. 담 밑에 서서 한참을 보다가, 발끝으로 땅을 두어 번 눌러 보았습니다."나.. 2026. 8. 30. 저를 팔아넘겼다 믿고 스무 해를 원망한 사내, 포구에는 잠녀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그해 여름, 섬에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밭이 갈라졌고 바람이 사나워 배도 못 나갔습니다. 잠녀들도 물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지요.바닷가 마을에 오누이가 살았습니다. 누이는 보름이라 했고 그해 열여덟이었습니다. 동생은 칠복이라 했고 열둘이었지요.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떴고, 아버지가 탄 배는 그해 봄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보름은 열셋부터 물에 들어갔습니다. 칠복은 바위에 앉아 누이를 기다렸지요. 태왁이 물 위에 떠 있다가 그 곁으로 누이 머리가 쏙 올라오면, 그제야 저도 모르게 숨을 뱉었습니다. 누이가 물속에 있는 동안은 저도 숨을 참고 있었던 것입니다.가을이 되어도 비는 오지 않았고, 사람들이 하나둘 뭍으로 나갔습니다. 뱃삯은 어른 하나에 스무 냥, 아이는 그 반이라 했지요.그날 밤 보름은 잠을 자.. 2026. 8. 30. 떠돌이 환쟁이의 그림을 제 솜씨라 속이고 감사 앞에 나선 고을 참봉 고을에 그림 잘 그리는 어른이 하나 났다는 말이 돌았습니다.박참봉이라는 사람이었지요. 사람들이 그 집 사랑방에 걸린 그림을 보고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붓끝이 어찌나 야무진지 그림 속 사람의 눈동자가 보는 이를 따라 도는 것 같았으니까요.그런데 그 무렵 장터 한구석에서는, 떠돌이 환쟁이 하나가 국밥값을 못 내고 앉아 있었습니다.계춘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등에 진 것이라고는 봇짐 하나와 붓통이 전부였지요. 그 붓통은 도화서에서 붓을 잡던 아버지가 남긴 것이었습니다.계춘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그렸습니다. 먼저 묻고, 오래 듣고, 그러고 나서 붓을 들었지요. 웃으실 때 어느 쪽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는지, 화가 나면 어디를 만졌는지를 물었습니다."눈코입은 누구나 그립니다. 그런데 그것만 그려 놓으.. 2026. 8. 30. 그 집에서는 밤마다 다듬이 소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마을에서는 아무도 들은 적이 없다 하였지요 빈집이었습니다.싸리문은 반쯤 내려앉았고 마당에는 마른 풀이 사람 무릎까지 자라 있었지요. 그런데 그 마당 한복판에 다듬잇돌 하나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풀이 그 돌만 비껴 자란 것처럼 둘레가 훤했습니다.그 집에 든 이는 서윤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태 전까지 이웃 고을 관가에서 문서를 다루던 아전이었지요. 창고의 곡식이 축났고, 장부를 맡았던 사람이 책임을 졌습니다."제가 적은 것과 창고에 있는 것이 다릅니다."그 말을 여러 번 했으나 아무도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서윤보는 말수가 줄었지요.값이 그리 싼 까닭을 물으니, 집을 놓아 준 사내는 오래 비어 있어 그렇다고만 했습니다.그 까닭을 알게 된 것은 그날 밤이었습니다.또드락, 또드락.느리고 고른 소리였습니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달이 밝아.. 2026. 8. 23. 주막을 빼앗으려 외상값을 거꾸로 뒤집은 객주, 그 집 아궁이 뒤에는 짚 다발이 걸려 있었습니다 옛날 옛적, 경상도 어느 고을 어귀에 지붕이 나직한 주막 한 채가 있었습니다.주막을 꾸리는 이는 순덕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지아비를 잃고, 눈 어두운 시어머니 곰례와 둘이서 그 집을 지켰지요.순덕에게는 큰 근심이 하나 있었습니다. 글을 몰랐던 것입니다. 외상은 자꾸 생기는데 적어 둘 수가 없었지요.어느 날 부엌 뒤에 쪼그려 앉은 며느리 곁에, 시어머니가 짚 한 줌을 들고 와 앉았습니다."글을 모르면 손으로 적으면 되느니라."같은 짚으로 새끼 두 오리를 꼬아, 두 줄 같은 자리에 매듭을 하나씩 앉혔습니다. 하나는 주모가 갖고 하나는 술 마신 사람이 갖는 것이었지요."갚으면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함께 푼다. 매듭은 두 손이 지어야 풀리느니라."그 뒤로 주막의 셈은 짚으로 갔습니다. 아궁이 뒤 시렁에 짚 다발.. 2026. 8. 23. 어미 장례비로 맡긴 은가락지, 세 해 만에 찾으러 가자 무게가 달랐습니다 옛날 옛적, 강원도 원주 장터에 은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은을 녹여 비녀며 가락지를 짓기도 하고, 급한 사람이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려 가기도 하는 집이었지요.장터에서 남쪽으로 십 리쯤 가면 청산댁이라는 여인이 딸 하나를 데리고 살았습니다.이 여인에게는 이상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왼손 넷째 손가락의 은가락지를 한 번도 빼지 않는 것이었지요. 밭을 매면서도 끼고 있었고, 빨래를 하면서도 그대로였습니다."어머니, 그건 왜 안 빼세요.""안 빠진다."그리 말하고 웃었지요.청산댁이 자리에 누운 것은 그해 가을이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밤, 어미가 딸을 불러 왼손을 들어 보였습니다."이것만은 네 것이다. 굶어도 팔지 마라. 이것에는 네가 있다."곱단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어미는 그 밤을 넘기지 못했습.. 2026. 8. 23. "사흘만 제 남편이 되어 주세요" — 청상과부가 지나던 선비에게 건넨 뜻밖의 부탁 옛날 옛적, 경상도 안동 고을에 이씨 문중이 있었습니다. 솟을대문이 높고, 고을 원님도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렸다지요.그 문중에 정월이라는 새댁이 있었습니다. 혼례를 올린 지 반년 만에 남편을 잃은, 스물한 살 청상과부였습니다.남편은 숨을 거두기 전날 밤, 정월의 손을 잡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내가 가거든…… 이 집을 나가시오."그때 정월은 그 말뜻을 알지 못했습니다.사십구재가 끝나고 열흘쯤 지난 날, 문중 어른들이 종가 사랑채에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문장 어른이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지요."자네들, 잘 생각해 보게. 며느리 하나의 목숨인가, 삼백 년 이어 온 문중인가."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침묵이 곧 답이었지요.그날부터 정월에게 사흘이 주어졌습니다. 밥상만 문 앞에 놓였다가.. 2026. 8. 22. "삼 년만 기다려 다오" — 과거 보러 떠난 선비를 기다린 기생, 그 십 년의 끝에는 "관기가 사또의 명을 거역하다니! 당장 옥에 가두고 곤장을 쳐라!"평안도 성천 고을 관아 마당에, 한 여인이 끌려 나와 있었습니다. 사또의 수청을 들라는 명을 거역한 죄였지요.이 여인이 지키려 한 것은, 다섯 해 전 강가에서 한 사내와 나눈 약속 하나뿐이었습니다.그 사내는 한양에서 내려온 가난한 선비였습니다. 강선루가 좋다는 말을 듣고 왔으면서도, 정작 누각에는 오르지 않겠다던 사람이었지요."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강이 작아 보이거든. 나는 강을 작게 보고 싶지 않소."떠나던 날, 선비는 강둑에 어린 버드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삼 년만 주시오. 그 안에 급제해서 돌아오리다. 내가 돌아왔을 때 이 나무가 낭자보다 크거든, 내가 늦은 줄 알겠소."채련은 제 옷고름을 한 자락 찢어 그 가지에 매듭을 지어 .. 2026. 8. 22. 이전 1 2 3 4 ··· 40 다음